구석진 곳에 있던 한 박스를 열다


이사를 준비하며 제가 가진 여러 물건들을 다시 한 번 만져보게 되었습니다. 물건이 아직도 너무 많아서 오래 걸릴 것이라 생각했던 복층 정리도 하나씩 진행되었습니다. 많은 잡동사니들은 정리되고 가져갈 물건들은 박스에 담겨 한 켠에 차곡차곡 쌓일 때 쯤, 복층 맨 끝 언저리에 있는 상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사실 저는 그 상자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마지막에 열었습니다. 그것은 저에 대한 추억과 기록들을 모아놓은 상자였습니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이 상자를 열었을 때 아주 많은 감정들이 올라왔습니다. 주말이라 몸이 피곤한 상태였지만, 이 상자에 있는 물건들을 살펴보는 일은 모순되는 표현을 사용하자면 '침착하게 흥분되는 일' 중 하나였습니다.



쉽게 버려지지 않는 물건들


1) 수첩

상자의 한 켠에는 제가 무엇인가 기록하고 쓰다만 수첩들이 한 가득 있었습니다. 이 기록들을 모두 컴퓨터로 옮기고 이 수첩들은 모두 폐기하려고 한 적도 있었지만, 시간도 오래 걸릴 뿐 아니라 왠지 내가 없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에 수첩 폐기하는 일을 멈추었습니다. 젊은 날에 치열했던 삶의 기록. 그 수첩들은 쉽게 버릴 수 없는 물건 중 하나였습니다.


2) 편지들


저는 삶에서 대인관계를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가족 뿐만 아니라, 친구, 직장 동료 등 많은 사람들에게 받은 엽서와 편지들도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생각해서 시간과 노력을 들여 글을 써서 보내준 것이라는 생각에 쉽게 손에서 놓아지지가 않았습니다. 


3) 우정을 상징하는 선물들

우정을 나누며 받은 선물들은 기념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정리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외국 친구들에게 받은 선물들은 쉽게 구하기 어려운 물건들이 많고 또 그 나라를 상징하고 있는 물건들이어서 기념으로 보관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정리한 물건들


1) 비행기표, 영화 티켓, 관광지 티켓 등

저의 추억의 시간과 장소가 기록되어 있는 각종 티켓들도 어떻게 보면 하나의 기록물이지만, 꼭 그 티켓들을 계속 보관하기 보다는 거기서 느낀 기억과 느낌을 마음속으로 간직하기로 하고 정리하였습니다.


2) 추억이지만 상한 물건들

오래 보관한 탓에 곰팡이가 쓸어 더 이상 추억을 생각하거나 의미를 기념할 수 없는  물건들은 정리하였습니다.


3) 더 이상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기록들

긍정적인 기억이 떠오르기 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을 떠올리게 하거나, 마음에 더 담아두지 않아도 되는 기록물이나 사진들은 정리하였습니다.






물건을 정리하며 생각해 본 '추억'의 의미


각 물건에는 추억과 기억과 느낌과 감정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러한 물건들은 더더욱 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씩 꺼내어보며 잊었던 기억들을 다시 떠올려보기도 하고, 잊어도 되는 기억들은 시원하게 정리하고, 오늘 그렇게 추억과 함께 보낸 시간이었습니다.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느낀 점은 '물건 보관 = 추억보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추억과 기억들은 지금의 저의 내면을 이루는 뼈와 살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많은 물건을 손에서 놓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물건들이 제 손에서 물질로서는 사라지고 그 추억은 제 마음과 기억속에 남을 때 까지 이 물건들을 살펴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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